물은 윗물부터 맑아야하는 것이 순리이다-➋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
중용 제10장에 말씀이다. ‘고군자화이불류, 강재교, 중립이불의, 강재교(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이 말씀은 ‘군자는 너그러움과 강함과도 잘 어울리나 속된 것에 휩쓸리지 않으니 이것이 강함을 바로잡아 세우는 것이요, 중용의 도리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강이니라.’라는 뜻이다.
조광조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감한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을 강하게 도모하는 추진도 좋았다. 하지만 강함을 강함으로 맞섰을 뿐 너그러움과 강함의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따라서 반발하는 세력들에게 오히려 공격을 받는 빌미를 제공했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충신 조광조는 분명 대어(大魚)임이 분명하다. 또 조광조 같은 인품의 충신이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라는 참뜻을 분명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정치적 목적을 끝까지 이루지 못한 것은 그가 깨끗한 물에 대어(大魚)였기 때문이 아니라 더럽게 오염된 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물고기들과 적당히 썩은 관리들에 밥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정치적 환경과 현실 때문이다.
그럼 물이 맑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맑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사뭇 헛갈린다. 또 맑은 물은 물이고, 맑지 않은 물은 물이 아니냐는 반론도 헛갈린다. 공기 중에도 탁한 공기와 맑은 공기가 있다. 그러나 모두 다 하나의 공기이듯이 맑은 물도 물이요, 탁한 물도 하나의 물이다. 그러나 어쨌든 물은 맑아야 한다. 맑은 물이 많을 때에 탁한 물을 희석시켜서 큰 고기, 작은 고기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탁한 물도 너무 탁하면 큰 고기, 작은 고기 모두 살기 어렵다. 하지만 환경적으로 탁한 물이 발생할 수는 있으나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흘러서 탁한 물을 빨리빨리 정화시키고 그 물속에 모든 생명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할 때 자연이 아름답게 살아 숨 쉴 수 있다.
자연의 생명들에게도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은 인간처럼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물속에 또 다른 생명들이 그 물속에 존재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수어지교(水魚之交)”의 관계처럼 조화와 균형으로 물의 맑기를 조절하여 물도 살고, 고기도 함께 살 수 있는 물이라면 더 없이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요즘 권력을 보자. 아랫물, 윗물이 따로 없다. 탁하긴 윗물이 더 썩었다. 아랫물은 아랫물대로 흐리고 윗물은 윗물대로 흐린 것이 일반화된 사회적 현상이요, 통념이다. 외국속담에 “너무 깨끗한 그에게는 파리도 앉으려 하지 않는다.(He is so clean, a fly would not sit on him.)”라고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만 하면 그들이 너를 칭찬할 것이다.(Do as most men do and men will speak well of you.)”라는 속담도 있다.
그렇다. 적당해야지 얼마나 깨끗하면 파리조차도 피곤해서 가까이 하기를 꺼렸을까? 그것은 이타의 정신보다는 편향된 자기중심주의와 에고이즘의 결과이다. 따라서 상생과는 거리가 멀고, 먹을 것을 전혀 만들지 않기 때문에 관계의 필요성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결론이다. 즉, 관계란? 유유상종이나 상부상조의 관계를 전제하는 가치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물은 어떤 경우라도 윗물이 맑아야 한다. 물의 흐름과 속성으로 보아 윗물이 맑으면 자연이 아랫물도 맑다. 그렇게 해서 윗물이 아랫물에게 더욱 당당할 수 있기를 한국정치와 권력에 기대해 봄이 어떨지. 그것은 아직 시기상조일까?
신용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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