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산신문

[이운묵의 벌가벌가] 배움은 세상을 여는 지혜의 열쇠다-➋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7. 1. 6. 11:03

배움은 세상을 여는 지혜의 열쇠다-➋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과거 부모세대엔 어쩔 수 없어서 학문연마에 때를 놓친 경우가 많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때를 놓쳤다면 늦었으면 늦은 대로 배움에 임하는 것이 차선책이고 최선이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좌우명에서 “나는 아직도 공부하고 있다.(Still I am learning.)”라고 했다. 그 말은 모르는 것은 언제든 배워야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속담에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다. 요즘 같이 약자가 살기 힘든 세상에서는 그 힘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절대적 원동력이 되는지 알 수 있다. 힘이 없으면 바로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그렇듯이 힘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현대문명사회에서 그 힘을 갖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학문에 힘이 없으면 재물에라도 힘이 있어야 이 시대를 살 수 있다.
그러나 재물에 힘인들 쉬운 일인가. 일반 서민들에겐 학문에 힘도 어려운 일이지만 재물에 힘은 더더욱 어렵다. 때문에 어려운 서민과 약자의 환경에선 더욱 청소년기 학문연마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중용 제20장에 말씀이다. ‘자왈 호학근호지, 역행근호인, 지치근호용(子曰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 지사삼자, 즉지소이수신, 지소이수신, 즉지소이치인, 지소이치인, 즉지소이치천하국가의!(知斯三者, 則知所以脩身, 知所以脩神,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라 했다. 이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움을 좋아하면 지혜(智慧)에 가까워질 수 있고, 힘써서 행하면 인애(仁愛)함에 가까워질 수 있으며,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면 참된 용기(勇氣)에 가까워질 수 있다.’ 또 ‘이 세 가지를 아는 자는, 곧 수신(修身)하는 바를 알고, 이렇게 수신하는 방법을 알면, 곧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게 되면, 곧 아는 것이 세상에서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이다.’라는 뜻이다.
중용 제20장 말미의 말씀이다.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篤行之). 유불학학지, 불능불조야(有弗學學之, 弗能弗措也).이 말씀은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깊이 생각하고, 사리분별에 밝으며, 독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배우지 않은 것이 있어 배우려한다면, 능하지 않고서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배움은 이와 같다. 그럴진대 어찌 배움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과 이유에 의해서 배움의 시기를 놓쳤더라도 뒤에 갈고 닦으면 배움은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다.
나의 힘을 키우는 궁극적 목적은 내가 이 세상에 바로 서고, 삶의 지혜를 열어가기 위함이다. 내가 이 세상에 중심을 잡고 바로 선다는 것은 사람다운 모습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의미이기도 하다. 또 내가 세상에 바로 설 수 있으니 내 주위에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을 바로잡아 세울 수도 있다. 나의 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더불어 사는 세상에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中心=가운데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하루하루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거나 외줄을 타는 것과 같기 때문에 늘 중심을 잃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때문에 국가의 번영과 국민에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그 중심을 잃지 말아야한다. 우리 사회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 국가의 미래다. 내가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내가 바로 서서 그 중심을 지켜내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이 학문에 힘을 키워야하는 당위성과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