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산신문

[이운묵의 벌가벌가] 젊음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➊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6. 12. 28. 17:38

젊음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➊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 이 말은 송나라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 어렵나니, 한 순간의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기지 마라.’는 뜻이다.
필자도 유년시절 이 뜻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 책상머리 벽면이나 중요 필기장, 비망록마다에 표어처럼 써놓았던 단골메뉴였다. 학문에는 때가 따로 없다. 나이 들어서도 그 무엇인가를 끝없이 배우고자 열망하는 실버세대의 만학도들에 그 꿈과 열정 뜨겁다. 과거 어려웠던 때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공부대신 어른들에 일손을 도와야 했고, 일찌감치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팍팍한 가정경제에 일익을 담당해야했던 소년소녀시절에 주역들이 지금에 실버세대이다.
공부할 때 공부하지 못하고 일을 한다는 것은 학문탐구의 적령기를 놓쳤다는 의미이다. 외국 속담에 “학문은 세상을 여는 열쇠다.(Learning is the key to the world.)”, “배우는 데는 지름길이 없다.(There is no royal to learning.)”라는 말이 있다. 동서고금 어디를 막론하고 학문연마에 대해선 모두가 비슷한 입장과 인식이다. 배워야 되는 청소년기 학생들에게 있어서 배움을 일깨우기 위해 중요한 경각심을 주는 좋은 메시지이다.
공부는 누구에게나 사회인으로 성장했을 때 잘 갖추어진 인성과 지식으로 일은 물론 진정한 사회구성원으로 그 역할과 책임을 성실히 하고, 자기 자신의 성공된 삶을 살기 위한 목적에서다. 그러한 기초적 필요조건으로서 학창시절은 그 능력과 자질을 연마하는 기간이다. 때문에 배워야하는 학생의 본분은 학업이 제일의 본분이다. 따라서 공부할 때는 공부를 하고, 공부를 마친 뒤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을 하는 것이 삶을 거스르지 않는 당연한 순서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여 부조화의 삶을 산다면 당연히 그 삶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수레와 같이 삐걱거림과 난관과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누구나 배움의 길이 같을 수는 없다. 우리 주변에서 그 온갖 삐걱거림에 시련을 비장한 각오와 인내로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소수다. 불리한 조건에서 유리한 조건을 이겨낸다고 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소수에게 주어지는 큰 행운이다. 그 행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불가능에 도전해서 행운을 쟁취하기란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무모한 일이고 바보스럽다고 비판 받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무모함을 무릅쓰고 배움에 인재들이 애써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각기 삶의 환경과 조건이 다르고 어쩔 수 없어서 배움을 뒤로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거나 옳지 않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과 현실에서 선택된 삶의 결과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배워야하는 청소년기를 지나쳐버리고 30대가 되고,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었다. 학문을 닦아야 할 시기를 놓치면 이렇게 학문은 점점 더 어렵고 젊은 세대를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다. 그리고 학문적 성과를 크게 거두기도 어렵다. 가급적이면 때를 놓치지 말고 적기에 학문연마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도 가기 힘든 대학을 누구는 금수저의 덕분으로 금메달까지 땄다. 최순실 게이트 학사비리에 피해자가 된 학생들이 충분히 분노할 만하다. 하지만 분노를 꾹 참아내고 다시 공부하자. 미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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