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묵의 시사칼럼]
신용산신문 주간 제806호 2018년 7월 5일(목)~7월 11일(수)
이제 용산은 새천년의 새 역사를 준비할 때
2018년 6월 29일 주한미군사령부가 드디어 용산을 떠나 평택기지로 이주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주둔한지 무려 73년만이다. 주한미군이 자리한 용산은 월래 일제의 총독관저와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병영시설 등이 있던 곳으로 일장기가 휘날렸고 한민족의 뼈아픈 역사의 골 깊은 상처를 헤집어낸 심장부이다. 이곳에 주한미군이 있었던 배경은 북한의 적화야욕과 침공위협으로부터 수도서울을 방어하고 수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세계 유일의 도심 속 군사기지로 용산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 용산엔 유독 외국 군대의 주둔 역사가 많았다. 약 750여 전 고려 말 한반도를 침공한 몽골군이 병참기지로 삼았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때는 왜군과 명군이 주둔했었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의 군대가 주둔했었다. 바로 이 청군의 지휘소가 구한말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을 끌고 와 국권을 능멸하고 무릎을 꿇게 했던 치욕의 한이 서려있었던 곳이다. 그 이후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일제는 용산을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과거 용산이 외국군대의 주둔지가 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용산은 우리 한국역사에서 참을 수 없는 치욕과 굴욕적 역사이자 아픔과 눈물의 상처를 품고 있는 아픔과 눈물의 땅(區)이다. 하지만 용산은 서울시의 중심이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경제 부흥의 요충지이다. 때문에 이제 오랜 세월의 악몽과도 같았던 역사의 만고풍상을 잘 이겨내고 21세기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자랑스럽게도 세계로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용산은 서울시 25개구 가운데 가장 중심에서 가장 굴곡진 아픈 역사의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힘차게 일어서고 있다. 민선 7기 성장현 청장을 중심으로 새 시대의 비전과 사명감으로 행복한 용산의 미래도시를 설계하고 있고, 자연과 사람이 함께하는 브랜드 슬로건 속에 구정의 목표와 운영방안도 수립하고 있다. 용산은 서울시의 중심 그리고 한국 속에 중심뿐만이 아니라 세계 속의 중심을 향한 미래도시를 야심차게 표방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정의 핵심 플랜으로 ‘나눔 복지’, ‘미래 교육’, ‘안전도시’, ‘상상개발’, ‘소통문화’라는 5대 구정의 목표와 마스터플랜으로 구정의 동력을 활기차게 가동시키고 있다. 이 목표와 설계 속에 용산구의 번영과 구민 행복이 하나하나 싹트고 실행되고 있음이 피부로 감지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용산은 용산의 지역경제를 부흥시키고 용산구민만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만으로 용산의 시대적 사명과 소명의식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만족해서는 곤란하다. 용산은 곧 수도서울의 얼굴이요 간판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도 그 중심이다.
중심은 뭔가? 중심은 외연의 영역을 위해 존재하는 구심점이다. 따라서 타지방자치단체와 공생공영의 번영을 이루는 주체적 중심으로 거듭날 때에 진정한 중심이 된다. 나아가 세계로의 중심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직 용산은 용산만을 위한 용산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이다. 새 시대의 슬로건과 비전은 세계 속의 중심을 향하고 있지만 아직은 세계 속의 변방이다.
이제 용산은 대한민국 ‘새천년 새 역사 창조’의 중심에서 거시적 비전과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새 역사를 창조하고 새 역사를 쓰는 것은 아픈 역사의 과거 지우기나 몇몇 역사의 숨결을 더듬고 각종 문화적 행사를 하는 것만으로 새 역사가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새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온고지신의 얼과 시대적 사명감으로 과거의 얼룩진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가적 철학의 바탕 위에 써질 때 비로소 새 역사가 시작됨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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