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포엠 포커스>
공감, 그 이중적 거리와 모순(矛盾)의 해법-
정은기 시인의 눈부신 형사(形似)와 소통의 통로
엄창섭(문학평론가, 김동명학회 회장, 본지 주간)
1. 삶의 구조와 빛나는 서정의 감응(感應)
논의에 앞서 개아(個我)의 다스리기와 시적 합리성에 의한 창조 활동은 유의미한 작위(作爲)에 해당한다. 한 사람의 특정한 시인이 현존성에 지혜롭게 대처하며, 생존하는 양상은 다각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고 조응(調應)함에 따라 그 명료성은 점차 확인될 것이다. 까닭에 ‘작은 신의 대언자(代言者)’로 지칭되는 정신작업의 종사자가 삶의 일상에서 체득한 자잘한 상상력의 실마리를 절제된 감정으로 형상화한 정제(整齊)된 시편을 검증의 대상물로 확정하고, ‘삶의 구조와 빛나는 서정의 감응’을 ‘세계문학의 구름다리’인 『모던포엠』 vol. 177호 「모던포엠 포커스」의 분할 행위는 예외 없이 빛나는 생명체로서 호흡과도 같은 지속적인 내적 발현(發現)에 기인(起因)한다. 따라서 그 같은 「공감, 그 이중적 거리와 모순의 해법-정은기 시인의 눈부신 형사와 소통의 통로」의 분할과 통합에 있어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잇닿음은 거부감이 없을뿐더러 특이하게도 시적 기법에 의해 공감각적 효과를 한층 더하고 있음도 그러하지만, 시적 상상력에 의한 묵언의 응시와 긴장감을 즉물적 현상의 특이성으로 비중 있게 거론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아니할 것이다.
특히 시적 상상력의 소유자가 독자와의 관계층위를 보다 치밀하고 짜임새 있게 결속시킨 그 자신의 시편들은, 마리아 릴케가 “시는 체험이다.”라고 전제하였듯 시적 간극(間隙)을 좁혀가며 슬로 라이프적인 미끄러짐의 시학에 접합시켜 놓은 생산적 결과물이다. 비록 ‘상처받은 영혼의 시적 치유’로 단정하지 않더라도 <콩나물>, <순간을 메모하다>, <자유>를 포함한 10편의 시편을 「모던포엠 포커스」의 상관물로 선별하여 독자들의 시선과 자각을 일깨워 결부시킬 정은기 시인은, 2004년 월간 『모던포엠』 시 부문 신인상의 당사자이며 제6회 『모던포엠』 문학상(금상)과 제1회 금천문학상을 수상한 자존감이 빛나는 존재이다. 그는 한때나마 계간 문예지의 편집장을 역임하였으며, 금천문인협회 사무국장 및 도서출판 「인문의 숲」 기획이사로 활동 중에 있다.
모름지기 견고한 성채(城砦)처럼 여백의 틈새를 치밀하고 촘촘히 직조하여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은, 전체적으로 어둠이나 칙칙함이 말끔 씻겨 난 시격의 발아(發芽)로 평상심을 유지시켜주는 담백한 시격(詩格)에 의해 작동되고 있어 비교적 시적 정조(情調)는 더없이 감미롭고 매혹적이다. 화자인 그 자신이 이 땅의 어느 시인보다 삶의 일상에서 ‘석간신문에 ‘미쳐서 살았고 정신 들어 죽었다.’는 돈키호테의 비문을 가슴에 담으며’ “쓴 민들레 거친 기침을 재우는 새벽/상처받지 않기를 기도하며 기립하는 아침엔/바다가 하는 일을 떠 올리며/안에서 밖으로 문을 연다/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이 따라가기 위해/생각을 앞질러 습관이 일터로 향한다. (순간을 메모하다)”에서 새삼 입증되어지듯, 아름다운 삶의 동행자가 되어 햇빛과 바람소리를 함께 감미롭게 체득하고 소통과 통섭(通涉)하는 시편의 틀 짜기에 깊은 사유의 통로를 관통하여 몰입하는 그만의 역동성과 매혹은 높이 평가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아니하다.
이와 같이 순수서정감과 시적 담론에 있어 새삼 정은기 시인이 지극히 선한 심성과 내면인식의 성숙에 다정다감함으로 그 자신의 시적 이미지를 엄격히 통제하되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풀어 보인 ‘합리성, 그 모순에 대한 사유’에 따뜻한 감수성의 기인으로, 우리가 합일하는 즉물 세계는 일정한 패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지향한 파상(波狀)이며 변전으로의 인식은 다시금 유념할 항목이다. 어디까지나 전통적으로 서정성은 시의 본말(本末)로 인간의식의 심층내부에서 공명 된 삶의 비의(秘意)를 응축해 왔다. 까닭에 서정성의 소외감을 떠올리는 시적 행위를 연민의 대상으로 존재감 있게 지탱하면서, 낮은 산자락을 오르거나 아침의 산 책길에서 접하는 낯익은 일상들을 시적 질료로 삼아 다양한 운문의 양식(樣式)으로 담아낸 그 자신의 정신적 작업은 “밑 빠진 시루/물 붓기를 한다 해도/한 뿌리 곧게 내려/높은음자리 희망가를 연주하는/콩나물, 참 순하고 맑은 이름 아닌가(콩나물)”라는 반문이 주어지듯 한층 더 감동적이다.
아울러 “미리 따지 않고/내버려 두니/스스로 참 맛이 생겼는지/물리지 않는 맛이다/자연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는 일/평화로운 규율로/감나무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보다. (자유)”에서 확인되듯이 진정한 자유의 개념은 단순히 제도에 의한 억압이나 구속이 아닌 종교적인 구원관에 잇닿아 있다. 따라서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현상에서 푸른 식물성언어와 존재의 눈부신 꽃으로 발화(發花)시키는 정신작업 종사자로서의 정직한 역할담당은 더없이 이채롭고 허망하여 끝내 신선한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망설임은 허락되지 않는다.
2. 시적 전율(戰慄)과 모순의 현재성
어디까지나 그만의 상상과 추상에 의한 내면인식에 침잠되어 빛나는 시적 치유를 위한 고뇌야말로 갈증의 시혼(詩魂)을 적셔주는 감동의 회복이기에 “시적 전율과 모순의 현재성”은 엄숙한 생명외경과 결속되는 연유로, 오랜 날의 탐색과 각고의 노력으로 카타르시스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그만의 개아적인 느낌, 색깔, 체취가 선명한 시적 형상화는 그의 시편인 <첼로>에서 ‘공간과 시각, 그리고 시적 기교성’을 해체하고 재창조하려는 강인한 집념으로 투명하게 확증되기에 시적 변명은 허락되지 않는다.
가로줄 무늬 세로줄 무늬 영롱한 불변함/비로소 현을 걸고 세상을 향한 소리는/퀘렌시아,*/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는 소리였어/살면서 그만한 공덕 또 어디 있을까//
-<첼로> 중에서
이와 같이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시간대에 순수성이 매도되어 미적 주권을 확립하기 힘겨운 혼돈(카오스)의 시간대에서도 ‘영혼의 안식’을 모색하는 정은기 시인이 본질적 고독 앞에서도 그 나름으로 삶의 매 순간을 ‘푸른 식물성언어로 생명의 존엄성’을 갈등·구조 속에서 소통의 도구로 교신하는 영혼의 울림은 지극히 합리적인 해법이다. 그렇다. 후기산업사회에서 생존하고 있는 대다수 시인들의 시적 발현에서 파생된 갈등과 모순에서 기인한 애매 모호성은 말끔 청산되어야 하기에, 그 자신의 다양한 시적 특이성은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생명기표로 통신되어 묵시적 교시의 시적 효과를 작동하고 있다. 한편 삶의 일상에서 자유로운 바람처럼 시공을 관통하고 부대끼는 자잘한 정감과 질료, 그리고 즉물적 현상을 촘촘한 시의미의 그물망으로 건져 올려 직조한 새로운 변주(變奏)는, 그간의 낡고 고루한 시각이나 막연한 전통성, 현실의 안주를 모색하기 위하여 극비리에 숨겨진 예리한 붓끝과 집념으로 해명될뿐더러, 지속적인 실험정신에 의한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가는 맑은 현(絃)의 울림이며 공명(共鳴)이다.
모름지기 언어공해가 심각한 후기산업화 사회에서 푸른 식물성언어에 관한 깊은 이해와 관심으로 담백하게 형상화하여 시의 본령을 충직하게 시대적 소임으로 실천궁행한 화자 자신의 시적 역동성은 지극히 생명적이다. 마치 그 같은 점은 밤하늘에 신비롭게 반짝이는 ‘북극성의 불변함처럼 우주를 왕래한 할머니의 얼굴은 반듯하고 단정해 있었지. 그것 보라니까, 그게 바로 사람이라는 거야.’라는 맥락에서 마침내 “신분 상승을 위해선 높이 올라야 할 사다리가 필요하지/그러나 그 끝에 올라보면/시민 계급 출신임을 까마득하게 잊고 말지/오직 찬란한 태양만 바라보며/힘겹게 올라왔던 아래의 풍경들에 눈가리개를 하고/경멸하듯 지난 기억을 통과해 버리고 말지/그게 인간이라니까(희곡으로 본 세상읽기)” 야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목숨의 시간은 언젠가 이름 모를 낯선 항구에 닻을 내리기까지 힘겨운 항해가 지속되어야 하기에 때로는 푸념처럼 ‘그게 인간이라니까’ 툭툭 뱉어버리듯, 치타슬로우(citta slow)적인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삶의 여백은 새삼 기다림과 여유로움으로 관계성을 지니기에 그 자신의 일관된 삶의 가르침은 소중한 생명감에 의해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이 시적 깊이를 공감하고 인식하는 사유의 차원에서 ‘상처가 아물려면 가려울 테니 긁지 말라’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처럼’ 흘려버린 아득한 기억 흔적을 다시금 떠올리며 “싸리 꽃처럼 붉은 새살/곱게 도드라질 때/상처도 꽃으로 핀다는 걸 알았지(상처)”라며 삶의 일상에서 터득한 체험을 긴장감 뒤, 한순간 호흡의 멈춤을 허락하지 아니한 체념으로 휴지부의 반복을 거듭한 그 자신의 시흥(詩興)은, 칼릴 지브란이 “언어를 살려놓는 수단은 시인의 심성과 그의 입술과 그의 손가락들 사이에 존재한다... (중략)... 그가 죽으면 언어는 뒤에 남아 그의 무덤 위에 몸을 던지고는 다른 어떤 시인이 와서 일으켜 세워 줄 때까지 슬피 흐느껴 운다.”라는 배경지식(schema)과 잇닿아 있음도 한 번쯤은 유념할 일이다.
어디까지나 놀랍게도 그의 확장된 시적 상상력은 시공을 가로지르고, 몽환(夢幻)적인 담백한 시격은 어둠이나 칙칙함을 말끔 씻겨내고 있기에, 언뜻언뜻 이 시대의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인 현재성에 있어 갈등과 대립이라는 모순성에 따른 “이분법에 익숙한 냉소와/온전한 언어를 바람에 의해 수정시키는 광장엔/잡초라 설움 받던 풀꽃의 향기가 군락을 이루고/진부한 깃대마다/불행을 부재로 만드느라 바쁜 현장이 있었다.(2017 광화문)”라는 시적 상상력의 확장은, 안타깝게도 한국전쟁(The Korea War) 이후 지구상의 가장 비극적인 우리가 운명적으로 공동체의식을 감내해야 할 절박하고도 처연(悽然)한 정신기후로 이분법의 정치현상에 연유한다.
3. 시적 형사(形似)의 빛남과 따뜻한 감성
모름지기 존엄한 생명외경을 의식하고 유형적 인상과 시학의 합리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그 자신의 감동적인 시편은 “시적 형사의 빛남과 따뜻한 감성”의 정신적 생산물로 모든 감각을 오랫동안 신중하게 교란시킴으로써 존재로서의 역할을 엄숙하게 실행한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로 풀이된다. 이처럼 정신적 피폐함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세상살이의 안부를 전하며 그 깊이 내재 된 삶의 형상과 무게, 그리고 색채를 명증하고 낯익은 기억 흔적을 통한 그만의 체험은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는 정은기 시인의 절제된 시학과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에 의한 시적 형상화는 애매 모호성을 말끔 씻겨낸 극명하고 절제된 시학은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작열하고 있는 까닭에 더없이 생명감이 넘쳐난다.
어디까지나 한 편의 시는 존재 내면의 증상(症狀)이기에 사회학·심리학·음악학 등에 비판이론이 제기될 수 있다. 미학의 발전을 역사진화와 진리추구의 중요 요소로 역설한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는 서정시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질과는 상이하게도 양적 진화라는 측면에서 지금도 여전히 시의 모태(母胎)인 서정시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서정성은 시의 본질적인 인자(因子)로서 인간의 내면의식의 심층에서 공명된 삶의 비의(秘意)를 응축하기에,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인 우리가 낡은 일간신문을 뒤척이듯이 “그가 만든 단편영화/‘격정소나타’가/그 짧은 인생을 배웅하고 있었을 뿐//굶주린 예술, 문학이 죽어 나간/빈집을 향해/또, 누군가 이삿짐을 나르고 있다.(빈집-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앞에)”의 보기처럼 무명작가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눈물겨운 정신풍경화는 마침내 소외된 타자가 아닌 ‘내 자신의 스토리’로 변형되어 “갈라진 흙벽 사이로 새어드는 빛에/소금같이 하얗고 조그만 풀꽃이 보였지/그 꽃과 눈을 맞추면/참, 신기하게도 무서움 없이 따뜻했거든/지금 생각해보면/그 꼬맹이 풀꽃은 내 정신의 바다였나 보다(나의 이야기)”라는 영혼의 울림은 ‘작은 풀꽃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접하고 발견하는 삶의 현재성이라면 시편 <젖무리>의 질료인 ‘금계랍’은 퀴닌(quinine)의 별칭으로 말라리아의 특효약으로 사용되었다. 화자 자신이 놀랍게도 아득한 유아기의 기억을 되돌려 “과꽃같이 고요한 젖꽃판/달콤한 향기에 얼굴 묻고 마냥 벙글 때//금계랍 바르고 붉은 요오드팅크 바르며/쓴맛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했지//살며, 어깨 내려앉고/발걸음 더뎌지면/금계랍 바르시던 어머니가 생각났어.(젖무리)”를 통한 시적 상상력에 의한 시적 발현(發現)은 ‘금계랍⤍요오드팅크⤍(어머니) 젖무리’의 진행으로 ‘모성(母性) 즉 자연’이란, 어머니의 풀어놓은 젖무덤같이 언제든 안기면 포근함과 넉넉함으로 감싸주는 곳, 파랗게 유년의 꿈 또한 자리한 공간이다. 비록 생득적 체험의 공간인 고향은 시대상황으로 인해 상실한 처소이지만, 의식 속에 항시 자리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고향의 서정적 양감(量感)은, 바로 모태이면서 미래를 꿈꾸는 자연공간이기에,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환기(喚起)시켜주는 생명적인 원형으로 풀이된다. 까닭에 고향회귀의 상징성은, 세상적인 고뇌와 갈등을 말끔히 치유시키는 모성으로의 동질성을 의미하는 ‘젖무리’는 유두 주위의 색이 진한 부분임은 짐짓 기억할 일이다.
이와 같이 상생과 통섭의 큰 틀에서 ‘극소수의 창조자’로 지칭하여도 지나치지 아니한 화자(persona) 정은기 시인의 지극히 생명적인 정신적 생산물은 잠시 우리들의 영혼을 푸른 초원과 생명나무 그늘로 인도하여 아집과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안식과 관조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 주는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를 기억하게 한다. 여기서 맑은 영혼과 날(刃) 푸른 예감의 소유자인 그 자신에게 소망하는 한결같은 기대감이라면, 깊은 사유(思惟)의 통로를 걸친 응축된 긴장감을 조절하되, 미끄러짐의 시학에 효용성을 보다 살려내어 그만의 ‘체취, 육성, 느낌’에 의한 시적 고뇌를 지속하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원래 불안정하고, 생각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확실하다.”라는 에리히 프롬의 역설도 그러하지만, 기독교의 「구약(舊約)」전도서의 “해 아래의 어느 것도 새것이 아니기에”라는 기록도 그러하지만, 그 점은 영국의 사실주의자 라아킨의 일관된 주장처럼 ‘가시적인 모든 것, 태양도 결국은 소멸될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모던포엠』 vol. 177호 「모던포엠 포커스」에서 그만의 특화되어 빛나는 시적 의미는 풀꽃 잘게 흔드는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이거나 산 여울의 자잘한 울림으로 끈끈한 친근감을 불러 일깨워주는 나직한 육성, 그리고 사각의 도시공간에서도 칙칙한 어둠의 그늘을 말끔 씻겨낸 정금처럼 반짝이는 정치(精緻)한 언어의 그물망으로 건져내는 역할수행이다. 모쪼록 이 땅의 어느 시인보다도 깊은 상처로 고통받는 영혼을 치유시켜 창조주 앞에 인도하는 작은 신의 대언자로서 상승작용의 지속적인 탐색이 어디까지나 개아적인 그만의 시적 매혹이며 충만한 생명감임을 다시금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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