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
울고, 웃는 사랑의 시학
이 운묵 (시인/문화평론가/『춤추는 동그라미』,
『인문의 시소를 타고 놀아보자』의 저자)
김 청숙 시인의 시는 한마디로 ‘달고 쓰고, 쓰고 달다’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달콤하게 농익는 과일은 없다. 모진 태풍, 눈 비바람 견뎌 내면서 따스한 햇살의 온기로 그 진한 향기와 맛을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렇듯 사랑도 처음부터 달콤하게 농익은 사랑은 없다. 맨 처음엔 아름답게 피어난 순수의 꽃잎에 반하여 파릇파릇한 사랑의 싹을 틔운다. 그 사랑의 잎이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눈썹같이 가는 미풍에도 흔들리게 되고 거세게 비바람 몰아치면 사정없이 마구 흔들려 머리채 가누기조차 어렵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몸과 마음은 그 중심을 잡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간다. 그러니 어찌 그 사랑의 맛과 향기가 어디 단맛뿐이랴. 달고 쓰고 맵고 시고 떨떠름한 맛, 마치 다섯 가지 맛이 나는 오미자의 맛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 오미자의 맛 또한 깊고, 오묘하고, 신비스러울 만큼 맛의 예술성에 최적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맛이다. 김 청숙 시인의 시 맛은 오미자가 마치 오장육부에 휘감아 도는 느낌이다.
누구나 처음 희망에 부풀어 잔뜩 기대했던 그 맛은 오간데 없고 떨떠름하고, 시큼하고, 쓰고, 맵고, 심지어는 소금 같이 짜기도 한 것이 사랑이다. 또 그 사랑의 모양은 어떤 모습이랴. 맨 처음엔 그 모양이 어떻게 생겼든 관계가 없다. 네모는 네모여서 좋고, 삼각형은 삼각형이어서 좋고,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여서 좋다. 모든 것이 미래 지향적이고 매우 긍정적이다. 그렇듯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이렇게 사랑은 사물의 모양마저도 하나로 일치시키고 관통해내는 마술을 지녔다.
그러나 그 사랑의 잎이 점점 커지고 나무의 그늘을 점점 확장해갈 때쯤이면 사랑의 형체가 참으로 다양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 모양 하나하나에 이유를 붙이게 된다. 너는 왜 삼각형이냐, 너는 왜 네모냐, 너는 왜 울퉁불퉁하냐. 이런 식으로 사랑의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맛에 자기 일방통행식 주관적 잣대와 각도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마구 집어 삼켰던 사랑의 과일들로 인해 오장육부와 오감은 그 부조화를 삭히지 못하고 부대껴 복통을 견디다 못해 마구 토하기가 십상이다. 그렇게 울며불며 단맛, 쓴맛 등 모두 다 토하고 나면 비로소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고를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랑의 상처를 입고 또 그 사랑의 상처가 아물기 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그래서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옛 대중가요가 있지 않는가. 세월이란 바람의 숨결이다. 바람의 숨결이 없이는 시간의 영혼도 무의미하다. 바람의 숨결이 모든 자연 만물의 영혼을 쓰다듬고 어루만진다. 바람의 영혼으로 빗질되고 어루만져진 사랑의 머릿결은 가지런하고 나부끼는 결결의 한 올, 한 올에 자유와 생명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솜털 같이 부드럽고 가벼우면서도 인생의 갈피와 질서를 느끼게 한다.
솜털같이 가벼운 날개로 무한에 영역을 비상하는 기쁨과 그 즐거움의 행복은 그냥 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그 모양과 맛 같은 것에 조건과 이유가 있을 수 없다. 힘들고 고뇌에 찬 삼투압작용의 결과에 의해 빚어진 결과이고 그 다음에 오는 먹기 좋게 숙성 된 행복의 맛일 게다.
김 청숙 시인의 사랑에 법칙은 한 번 사랑을 하고 기뻐하거나 혹은 슬퍼하거나 끝을 맺지 않는다. 미국의 소설가 어슐러 K. 르권이 사랑에 대해 말했다. “사랑이란? 돌처럼 한 번 놓인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빵처럼 항상 다시 새로 구워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사랑이 한 번 먹고 말 달콤함 같은 맛이라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굽고굽고 또 굽고’를 반복해야하는 과정이다. 바로 김 청숙 시인의 사랑에 법칙과 방식이 르권에 말처럼 ‘굽고굽고 또 굽고’를 반복하고 있다. 이미 구워진 빵이 식으면 다시 굽고 또 굽고를 반복한다. 어찌 보면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시인은 사랑의 빵 굽기를 끈기 있고 부지런하게 그렇게 ‘굽고굽고’를 반복한다.
그렇듯 빵을 굽는 것도 김 시인의 삶에 일상이요, 무덤덤하게 시간 흐르면서 아무도 모르게 꺼져버린 사랑의 불을 다시 지피는 것도 김 시인의 일상적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용할 빵을 굽는 일이나 꺼져버린 사랑과 사랑에 불씨를 지피는 일이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상이 아닌가. 우리 인간의 삶이 어디 한 번의 기쁨이나 슬픔으로 맺고 끝날 일인가? 그저 살아 있는 한 일상처럼 반복해야할 일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할 일’이다.
이처럼 소중한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모진 풍랑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등불이 아니다. 모진 비바람 풍랑에도 꺼지지 않는 불은 이 세상엔 없다. 있다면 그것은 쇠붙이나 돌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사랑의 모형일 뿐. 그것은 사랑 내면 깊숙이 은밀한 감정에 교감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 뜨거운 감정에 불꽃을 만들어내는 것은 반복해서 불을 지피는 인내와 고통,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 때에 비로소 소중한 사랑을 오래오래 지켜갈 수 있는 시뻘건 열정의 불덩이가 되어 오래오래 그 사랑의 열기가 따뜻한 기운으로 영혼 깊숙이 파고들게 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인스턴트 사랑이 횡횡하는 현실에서 김 청숙 시인의 시집『어느 것도 그대 아닌 것이 없다』에 사랑방식과 사랑법칙은 앞으로 많은 사랑을 해야 할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본보기라고 믿는다.
김 청숙 시인의 시는 그 사랑의 시어 하나하나가 시인의 일상 속에 삶 그 자체이다. 고난과 따스함, 고독과 번민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는 한 여인의 삶을 마치 한 폭의 파스텔톤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묘사해 가고 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이야기들이고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당사자 본인에게는 모든 일들이 특별하고 매우 소중한 것들이다. 시인 김 청숙은 이 시집을 통해서 아니 별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이미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었거나 앞으로 가정을 이루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반드시 극복해야할 사랑의 법칙과 방식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나누고자 함이 아닐까. 시인은 작은 행복과 작은 위로를 이렇게라도 전해주고자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시인이 보다 나은 세상을 그리며 평범하지만 소중한 사랑을 끝없이 잘 간직해낼 수 있는 행복의 메시지라고 가감 없이 전하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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