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들림시

[이운묵의 울림들림 리뷰] 밥그릇-정호승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7. 9. 11. 12:38

밥그릇

정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 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 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 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하고,?근심에 찬 여러 밤을?울면서 지새워 보지 못한 사람은?그대들을 알지 못하리, 천상의 힘들이여! 우리 인간들을 삶으로 인도하는 그대들,?이 가난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서?또 괴로움에 시달리게 하는구나!?그래, 모든 죄는 이 지상에서 그 업보를 치러야지!” 이 ‘눈물젖은 빵’은 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의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제2권 13장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호승 시인의 ‘밥그릇’은 괴테의 ‘눈물 젖은 빵’보다도 더 슬프다. 너무 슬퍼 눈물이 나려한다. 이 시에서 등장하는 개는 누구인가? 바로 그 개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존재 바로 우리에 이웃이고 나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사는 문명시대는 그렇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물질이 넘쳐나고 충만해도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고통과 불행의 시대이다.
지난 1997년 12월 3일은 우리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 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매우 우울하고 슬픈 날이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 20억 달러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하였다. 이른바 외환 위기였다. 대한민국은 외환보유액이 한때 39억 달러까지 급감했다. 하지만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는 면했다. 그 때에 직장을 잃은 아버지들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거리거리를 헤매며 방황했고, 사랑하는 가정은 해체되고 가족과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었다. 한때 국가경제의 부흥을 이끌었던 산업의 주체들이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한 순간 삶이 추락했다.
정호승 시인의 ‘밥그릇’은 그러한 아픔의 기억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그늘진 후미에는 어둠의 삶들이 한 끼니의 밥그릇을 갈구하면서 눈물짓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시인은 작품에서 ‘개’를 보여주고 있다. 그 개는 이성적이지도 않고, 이해적인 사리분별과 판단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이 살아야 할 최악의 버려진 삶에 질긴 생명성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런 존재가 가장 낮은 곳의 존재인 즉 ‘개’ 같은 삶이다.
이렇게 개의 밥그릇은 문명의 그늘 후미진 곳곳에 널려있다. 밥그릇의 밑바닥은 삶의 실체인 슬픔, 고통, 고독, 죽음 등을 나타내는 절망이다. 정호승 시인은 자신의 밥그릇(삶)을 깨끗이 비워 본적이 없으며 또한 삶을 충만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 또한 그 삶의 슬픔이나 절망을 순순히 견디어 내 본적도 없음직하다. 하지만 개는 ‘씩씩하’게 주어진 삶의 밑바닥까지 핥아내며, 나아가 타인의 '먹다 남은 밥'까지도 핥을 정도로 열심히 生을 살아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정호승 시인은 개가 밥을 먹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인생의 참 진리 깨닫고 있다. 이 시를 대하면서 얼마 전 ‘밥맛과 살맛’을 고매한 인문정신과 철학적 사상으로 운운한 나는 오히려 사치였음이 부끄러울 뿐임을 고백한다.

신용산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