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이상국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정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 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칡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농촌의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은유로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한 이상국 시인은 1946년 양양 강선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76년 문학지 「심상」을 통해 〈겨울 추상화〉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이상국 시인의 시세계는 매우 향토적이다. 향토의 서정성이 짙고 자연의 서정성이 매우 싱그럽고 향기롭다. 시인의 그런 작품들은 서민의 삶에 깊게 뿌리내린 소박한 육성이다. 그런 것이 이상국 시인의 진솔한 시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한 작품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읽히고 폭넓은 공감을 자아냈다는 평이다. 결코 화려한 시 문법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일상의 소박한 삶의 결들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시의 담백성은 시인의 삶과 진정성에 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러한 것들은 시인의 삶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상상력과 정감 어린 묘사이다. 자연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 느껴지는 정갈한 언어의 놀이이다. 그러한 언어의 가감 없는 유희는 서민들에 지친 일상의 고단함과 애환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삶의 깊고 오묘한 의미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위의 시 〈싸움〉도 자연과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가물 때는 논밭에 물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소나 돼지, 닭들로 인해 망가뜨린 농작물 때문에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싸움은 오래가지도 않고 그러다 곧 화해하고 상생과 협력을 도모한다.
그런데 위에 시 〈싸움〉에서 목숨 건 사생결단의 싸움을 보면서 떠오르는 싸움이 생각났다. 어떤 싸움이냐? 그 “징”한 싸움이 바로 정치판에 싸움을 보는 것 같다. 그런 정치판이야말로 등칡넝쿨 마냥 아랫도리가 잘려나가든지, 전나무의 숨통이 졸려 질식사를 하든지 해야 끝이 날 싸움 같아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짜증이 나고 화가 치민다.
월래 ‘구경 중에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일상에서 지친 국민들에게 재미는 주지 못할망정 저렇게 “징”한 싸움질들이나 하고 있으니 국민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위국에 마음과 행복은 우리 한국의 정치판에선 그렇게 요원하기만 한 것인가라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런데 어쩌랴. 우리 사회의 강자들이 저러고 있으니. 약자들은 지켜보고만 있어야지. 그런데 전나무와 등칡넝쿨은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든 거 같은데 저들은 과연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것일까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설마 국민에게…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이럴 때일수록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말처럼 우리 국민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후일에 닥칠 참담한 상황에 조용히 대처할 도리밖에…
신용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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