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김용택
사람들이 앞만 보며 부지런히 나를 앞질러갔습니다.
나는 산도 보고, 물도 보고, 눈도 보고, 빗줄기가 강물을 딛고 건너는 것도 보고,
꽃 피고 지는 것도 보며 깐닥깐닥 걷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요.
난 남았습니다.
남아서, 새, 어머니, 농부, 별, 늦게 지는 달, 눈, 비, 늦게 가는 철새,
일찍 부는 바람,
잎 진 살구나무랑 살기로 했습니다.
그냥 살기로 했답니다.
가을 다 가고 늦게 우는 철 잃은 풀벌레처럼
쓸쓸하게 남아
때로,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겨울을 따라가지 않은,
가을 햇살이 샛노란 콩잎에 떨어져 있습니다.
유혹 없는 가을 콩밭 속은 아름답지요.
천천히 가기로 합니다.
천천히, 가장 늦게 물들어 한 대엿새쯤 지나 지기로 합니다.
그 햇살 안으로 뜻밖의 낮달이 들어오고 있으니.
김용택 시인은 일명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 때문에 멸실의 운명에 처한 농업 현장에 남아 그 실상을 증언하는 농민 시인이자 빼어난 서정 시인이다. 김용택 시인은 모더니즘이나 민중문학 등의 문학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사랑을 받는 시인으로 우뚝 섰다. 그것은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자연의 섭리와 내면 깊이 교감하며 길어내는 정서와 서정의 근원성 때문이다.
그렇듯이 위의 시 〈자화상〉에서도 그의 정서와 서정성이 짙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앞만 보며 부지런히 나를 앞질러갔습니다./나는 산도 보고, 물도 보고, 눈도 보고, 빗줄기가 강물을 딛고 건너는 것도 보고,/꽃 피고 지는 것도 보며 깐닥깐닥 걷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현대는 경쟁의 시대이다. 경쟁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이다. 경쟁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한 좋든 싫든 경쟁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다른 경쟁자들이 자신을 앞질러가도 크게 개의치 않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이 앞질러가기에 몰두할 때 자신은 그 경쟁자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과 조우를 하면서 깐닥깐닥 세상의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자신의 뜻에 따라 가고 싶으면 가고, 멈추고 싶으며 멈추고, 놀고 싶으면 놀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주관과 존재의식이 선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만하거나 교만하지도 않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 따라 최선을 다해 길을 가기로 했다는 입장 표명이다. 충분히 경쟁을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경쟁을 포기한 후 시인은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경쟁의 대열은 다 떠나가고 혼자 남아서 “새, 어머니, 농부, 별, 늦게 지는 달, 눈, 비, 늦게 가는 철새, 일찍 부는 바람, 잎 진 살구나무랑” 자연의 하나가 되어 “그냥 살기로 했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냥 살기로 했다는 것은 별다른 조건이나 의미부여 없이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살기로 했다는 뜻이다.
현대사회는 스피드시대이다. 남보다 내가 더 빠르게 승진하고, 출세하고, 성공하여 최종의 목적지에 빨리 오르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목표이고 지향성이다. 그런데 “천천히 가기로 합니다./천천히, 가장 늦게 물들어 한 대엿새쯤 지나 지기로 합니다.” 이는 스피드시대성의 규칙에 역천하는 반칙이다.
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역시 김용택 시인이기에 가능한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시인이 주는 메시지는 깊고 넓고 두텁고 오묘한 우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선각자의 교훈 같은 강한 울림을 주는 작품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신용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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