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산신문

[이운묵의 벌가벌가]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➊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6. 11. 13. 22:35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➊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란? 한번 엎질러진 물은 물동이에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강태공이 초년시절 매우 가난했다. 그럼으로 그의 부인 마(馬)씨가 그만 친정으로 달아났다. 그 후 60세가 되었을 때 위수(渭水)에서 우연히 낚시질을 하다가 주나라의 시조 무왕(武王)의 아버지 서백(文王)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인연으로 결국 수상의 자리에 오르고 훗날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본명은 여상(呂尙)이고 별칭은 태공망이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선군(先君)인 태공(太公)이 오랫동안 찾던 어진 인물이라고 여긴 데서 유래되었다. 강태공이 그렇게 제후가 되자 가난했던 시절 친정으로 도망간 아내 마(馬)씨 부인이 찾아와서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강태공은 그 여인에게 물 한 동이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그 물을 다시 마당에 쏟게 했다. 그리고 다시 그 물을 물동이에 담게 했다. 부인 마씨는 당연히 그 물을 물동이에 다시 담을 수가 없었다. 이 때 강태공은 그 여인에게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집을 나간 부인도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고 그 청을 거절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렇다. 그 시절엔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어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현대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다시 주어 담을 수가 있다. 다시 주어 담지 못하면 물이 든 동이를 통째로 바꿔버리면 될 일이다. 그것이 현대사회의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 아닌 ‘복수유반분(覆水有返盆)의 방식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에서의 새롭게 변화된 가치기준이다. 참으로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황금에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질만능주의적 사고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엎어진 물쯤이야 되돌리는 것쯤은 문제도 아닌 시대이다.
아무 두려움 없이 황금만능주의적 변화가 팽배해지고 그런 의식의 사고가 신문명의 선봉에서 유행처럼 번져간다. 어쩌면 그것이 과거 억압된 봉건적, 유교적 편향에서 벗어난 신자유주의와 신자본주의 의식에서 생성된 관념적 현상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 중심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글로벌시대의 다양성 문화가 점점 체화의 과정을 형성하는 단계가 되었다.
그러나 한 번 엎어진 물동이나, 한 번 엎어진 가정이나 모두가 소중한 인간의 삶 속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자칫 잘못하여 물동이가 깨지거나 엎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어느 일방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부부공동의 책임이다. 어느 한 쪽에서만 물이 엎어지도록 방관하여 가정이 균형과 중심을 못 잡은 것은 아니다. 가정이 깨져서 물이 엎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은 부부공동의 책임이요 의무이다.
그런 점에서 친정으로 도망간 마(馬)씨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강태공과 같이 대성할 인품의 남편을 버리고 도망을 갔겠는가? 우리 속담에 ‘사흘 굶으면 도적질 안할 사람 없다’고 했다. 또한 ‘많은 설움 중에 배고픈 설움이 제일 서럽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배고픔은 참기가 어렵다. 도덕이고, 윤리고, 사랑이고 모두 다 소용없고 아무것도 눈에 보이질 않는 세상에 산다. 그런데 우리의 가치관을 세워주고 지켜주는 이성(理性)인들 어찌 제정신일 수 있으랴.
이제 정치는 당리당략과 정쟁을 멈추고 국민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중에 첫 번째 일이 아닐까?

신용산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