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묵의 울림들림 시 리뷰]
신용산신문 주간 제809호 2018년 7월 26일(목) ~ 8월 1일(수)
선 없는 선
시인/ 임규열
목을 축이러 갔었지
화요일 밤
누드 크로키
그 무렵의 나
사막의 던져진
한 마리 물고기
한 줌 갈증을 풀 수 있었던
서너 해 저녁의
드로잉 시간
만 가지 몸짓, 만 가지 삶의 표정이
한 겹의 문명 속에
숨겨져 있었네
무심코 걸친 옷이
영혼의 첩첩 감옥임을
수없는 곡선 속에서 알아차릴 무렵
비로소
선 없는 선,
그 환영 속에서 어른거리는
삶의 속살을 보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태허太虛
그 한 줄기 움직임을.
〈선 없는 선〉은 임규열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시인은 신학과를 졸업한 후 기독교 전문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의 공동대표이면서 에디터, 디자이너, 드로잉 화가이다. 또 등단을 하지 않은 무명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세계는 매우 넓고, 깊어 그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마치 심해의 물살과 같다는 느낌이다. 회색의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 오랜 시간 암흑의 깊은 바다 속에서 인고의 긴 시간을 견뎌낸 진주 빛처럼 곱고 은은하고 아름답다.
진주는 신비함의 보석이다. 그래서 ‘인어의 눈물’, ‘달의 눈물’이라 불린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할 때 몸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진주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은 순결함과 청순, 여성적인 매력을 가진 아름다움의 에로티시즘이기도 하다. 진주의 아름다운 빛은 절로 빚어진 빛깔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끝없이 체액을 분비하고 이물질을 밀어내며 만들어 낸 길고 긴 고통이 만들어낸 ‘눈물’이다.
위 시의 화두는 선이다. 〈선 없는 선〉은 읽는 이로 하여금 무미건조한 삶에 깊은 사유와 뮤즈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그 사유와 뮤즈의 깊은 계곡엔 맑고 청아한 생명성의 성찰과 관조가 돋보이는 리리시즘이다. 시인은 이 線을 통해서 삶의 질곡을 세밀하게 관조하고 있다. 선은 사물이나 타자와의 경계이면서 그 연을 잇는 매개이다. 그러한 선의 경계에서 ‘있음’에서 ‘없음’을, ‘없음’에서 ‘있음’을 보는 의식은 허상과 실체적 진실에 대한 관조적 의식이다. 또 선의 경계를 허물고 무력화함으로써 이원체계를 일원체계로 통합하려는 의식이다. 이는 곧 ‘색즉공, 공즉색’의 무경계와 자유의식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사물의 존재와 경계를 과감히 허물고 사유의 영역을 자유롭게 오간다. 시인에게 있어서 ‘線’은 일상적 누드 크로키의 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선은 시인의 삶에 양면성과 생명성의 영속성을 추구함이다. 그런데 그 영속성이 ‘끊겨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때문에 선이 있다 없다 또 없다 있다. 그렇게 끊임없는 재확인을 통해 얻은 것이 결국 선의 실종임을 발견하며 또 다른 존재의 실체를 인식한다.
인류 문명사의 시원은 線이다. 선에 의해서 모든 사물이 탄생되고 그 영속성이 유지되고 있다. 선은 또 다른 영역을 구분 짓는 경계이면서 상대를 존재케 하는 중심이다. “만 가지 몸짓, 만 가지 삶의 표정이/한 겹의 문명 속에/숨겨져 있었네”의 묘사에서 ‘한 겹’은 경계이면서 양면의 실체적 존재를 확인하는 진술이다. 음과 양, 선과 악, 불균과 균, 허와 실, 고와 낙, 행과 불, 미와 추, 생과 사 등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상반된 영역과 경계의 중심에 서서 ‘없음과 있음(생과 사)’ 그리고 태허(太虛)를 철학적 사고로 조용히 반추하고 투영시킴의 자세는 매우 진지하다.
이 같은 시인의 독백적 진술은 자신의 불안전성에서 완전성으로의 변태를 위한 기도이다. 이러한 삶의 탐구의식은 지난날의 아픈 페이소스의 잔상이자 환영이다. 시의 구조적 형식과 메타포가 있는 서술적 묘사와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의 백미는 이중, 삼중의 이미지 중첩을 오버랩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여백미를 갖게 하는 서정의 미학이면서 큰 감동을 주는 통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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