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들림시

[이운묵의 울림들림 시 리뷰] 넘어짐에 대하여/정호승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8. 8. 6. 10:38

[이운묵의 울림들림 시 리뷰]
신용산신문 주간 제810호 2018년 8월 2일(목) ~ 8월 8일(수)


넘어짐에 대하여

정호승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 이상 검은 물속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어떤 때는 물을 짚고 일어서다가
그만 물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예 물속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수련이 손을 뻗으면 수련의 손을 잡고
물고기들이 앞장서면 푸른 물고기의 길을 따라간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 세운다 할지라도


흔히 인간의 삶을 길 또는 여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길과 여행은 시간과 동행한다. 때론 짧게, 때론 길게 시간과 더불어 인류의 역사도 만들어진다. 이런 역사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자연이 만든 부작위의 길과 인간이 만들고 개척한 작위의 길이 있다. 그 부작위의 대표적인 길이 바로 물길이다. 이 부작위의 물길을 따라 인류는 문명창달을 이룬다. 또 하나는 자연의 바탕 위에 인위적으로 낸 작위의 그 길이다. 이 길은 부작위 자연의 물길을 거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 작위의 길과 부작위의 길을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싫든 좋든 그 길을 따라 삶의 긴 여정을 선택의 여지없이 숙명처럼 가야한다.

위의 시 〈넘어짐에 대하여〉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우리의 삶, 즉 인생길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무언의 길을 말하고 있다. 우린 작위의 길과 부작위의 물길을 따라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때론 천천히, 때론 빠르게, 때론 멈추었다가, 때론 우측으로, 때론 좌측으로 돌며 가고 멈추고를 반복하며 간다. 그게 물이다. 그렇게 물이 지나간 발자취가 물길이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물길을 통해 세상의 바다 오대양에 입성하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종착지 피안의 세계 즉 낙원이다.

굽이굽이 위험하고 척박한 세상살이 여행에서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으랴. 수없이 많은 원인과 이유에 의해서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한다. 물길의 종착은 바다이다. 무사히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잔잔한 물결을 지나 거친 파도를 넘는 일이다.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과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몸부림치지만 생각처럼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다.

때론 운이 좋아 넘어질 것 같다가도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때론 운이 나빠 넘어지지 않을 것 같다가도 넘어진다. 그럴 때마다 원인은 다르지만 일어서야 하는 목적과 당위성은 하나다. 그것은 삶의 종착인 바다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물위에서 넘어짐을 겁내지 않는다. 물위에서 넘어져도 일어서기만 하면 물은 언제나 바다를 향해 간다. 내를 지나, 강을 지나, 바다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호승 시인이 꼭 다른 데가 아닌 물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길 반복하는 이유는 과연 뭘까?

그렇다. 물은 바로 영원성이고, 생명성의 위대한 존재이다. 그 어떤 생명성도 물을 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물은 자연의 진리를 품고 잉태하는 존재이다. 시인이 물을 좋아하고 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자연의 진리를 품은 물에서 놀다가 넘어진들 어떠랴. 다시 일어서서 자신이 원하는 자세를 바로잡고 진리를 탐구하고 시행착오를 극복한다. 그러면서 물의 지혜와 진리로 균형을 잡고 물길을 따라 바다로 가려는 의식과 중심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