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들림시

[이운묵의 울림들림 시 리뷰] 강/이성복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8. 9. 18. 09:26

[이운묵의 울림들림 시 리뷰]
신용산신문 주간 제815호 2018년 9월 13일(목) ~ 9월 19일(수)




시인/이성복(1952~ )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 가는 조그만 마분지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이성복 시인에게 ‘강’은 그냥 강이 아니다. 그 강은 추우나 더우나 자기의 할 일과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가는 마치 구도자의 한 생과 같다. 굴러가는 세상의 소리는 시끌벅적 요란하고 어디로 어떻게 굴러갈지 예측 불가능이다. 비상식은 상식을 비웃고, 반정의는 정의를 비웃고, 문명은 자연을 능멸하고, 강자는 약자를 무참히 유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을 활보한다. 한마디로 짜증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임에도 강은 꿋꿋하게 자기의 소임을 다하며 자기의 길을 간다.

그런 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인은 바로 저것이 “인생이구나!” 하고 인생 그 자체의 의미를 곱씹는다. 사람이 사는 인생에 무슨 공식과 정답이 있으랴만 저렇게 유유히 말없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삶의 성찰과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희로애락’은 어떤 의미일까? 기쁨이 좋다고 해서 그 기쁨으로만 우리의 생을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슬픔과 괴로움이 싫다 해서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삶도 이 세상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을 아무 의미가 없는 무의미의성으로 정의하고 받아드리기엔 더욱 싫다. 그래서 우린 ‘희망’이라는 꿈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 희망은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하지만 그 통로를 벗어나는 길은 험하고 힘들고 괴로움의 시간들이다. 그러나 그 희망의 통로를 통과하여 벗어나면 그렇게 갈구하던 기쁨과 안락의 시간으로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그 안락과 기쁨의 시간에서 헛된 망상과 행동으로 경거망동하면 다시 절망의 강을 따라 절망의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때문에 시인은 희망 가운데서도 절망을 준비하고,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준비한다. 희망 가운데서도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라고 죽음을 준비하고, 절망을 준비한다. 그것은 이미 영원성이 될 수 없음으로 유한성에 대한 겸허적 수용이다. 그렇다. 아무리 문명이 찬란하고 인간이 영악해도 우리의 존재는 유한성에 불과한 존재이다.

인간의 삶이란 마치 ‘물결 위에 실려 가는 조그만 마분지조각’과 무엇이 다를까. 이 이성복 시인의 시 〈강〉은 요즘 같이 숨 막히도록 지독한 불볕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주는 작품이다. 싱그럽고 찬란한 봄날의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가을 같은 형형색색 기쁨을 노래하는 낭만을 느끼게는 하지 않지만 혼미한 불쾌의 소용돌이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중심을 잡고 미래로 나갈 방향에 중심을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쁨과 괴로움, 절망과 행복의 파도타기에서 중심을 잃지 않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를 전하고 있다.

강이 행복하기 위해 흐르는 강은 없다. 우리의 삶 또한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아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다만 위의 시처럼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처럼 알 수 없는 내일의 현실에 맞서 고통은 고통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극복해 내는 일이 우리가 ‘강’처럼 계속해서 흘러가야 하는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