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산신문

[이운묵의 벌가벌가] 가슴속에 씨 뿌리고 싹 틔워야 할 기상 호연지기-➋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7. 4. 4. 13:34

가슴속에 씨 뿌리고 싹 틔워야 할 기상 호연지기-➋
호연지기(浩然之氣)


21세기 과학문명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어떻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슴에 품고 살 수 있을까? 그렇다. 하지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내 마음에 호연지기가 충만 된 에너지를 잘 길러내려면 우선 내 마음에 ‘올바름’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그 정신과 기상이 시들지 않고 생기 있게 잘 가꾸고 돌봐야 한다. 성․선․도(聖․善․道)의 참된 마음과 정신이 마치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풀잎처럼 생기가 돌아야 한다.
최근 우리사회의 인문학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가 뜨겁다.‘정의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인문학적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관이다.
플라톤은 이런 정의를 도덕적, 윤리적 원리로 파악하기도 했다. 이 정의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구축한 최초의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인류사회의 정의를 사회적 원리로 이해했고, 배분적 정의와 평균적 정의로 구분하기도 했다. 근대에 와서 정의는 계몽주의적 영향으로 ‘평등원리’로서의 측면이 강조되었는데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는 정의는 다시 과학적 입장에서 비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법철학의 틀에서나 주목받고 관심 갖는 현실이 되었다.
그 동안 얼마나 우리사회의 정의가 설자리를 못 찾고 불의에 눈치를 살펴야 했는가? ‘불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의, 의리, 도의, 정의 따위에 반하는 개념이다. 권력과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신의성실이 불신과 배반으로 상처받고, 사회질서가 혼란과 무질서로 불안해지고, 불균형과 부조화로 형평성이 상실되고, 사회적 통념과 이성이 무시되는 반사회적, 반정의적 개념으로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제 물질의 욕망으로 잃어버린 우리 인간의 올바른 정서를 다시 되찾으려면 ‘호연지기’의 넓고 큰 기운과 도의에 바탕을 둔 도덕적 용기를 우리 가슴속에 씨 뿌리고 싹 틔워야 미래사회의 행복에 열매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늘 우리에게 길들여진 습성을 고쳐야한다. 우리는 산을 바라보되 숲은 보지 않고 근사하게 우뚝 솟은 나무와 바위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 숲속에 맑은 물이 있고, 무수한 생명이 있고, 자연의 숨소리와 같은 바람이 있고, 그 아름다운 생명의 소리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 속에 자연의 희로애락이 있고, 그 속에 자연의 중심이 있고, 우리 인간의 본성과 삶의 ‘조화로움과 균형’을 이루는 중심이 있음에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 중심의 모양과 색깔, 그 중심의 말과 소리 같은 것들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보려하지 않고 외면했다. 보기 쉬운 것만 보고 앞으로 달려간다. 좌우도 있고, 위아래도 있다는 것을 까맣게 망각했다.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에 생을 이루는 중심이 있고 모양과 성질의 진화에 따라서 균형과 조화의 축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자연에서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즐기려면 ‘참된 자유’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호연지기’에 이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맹자는 자기의 장점이 남의 말을 알아듣고 ‘호연지기’를 잘 기르는 것이라 했다.
서양속담에 “정신이 바로 사람이다.(The mind is the man.)”라고 했다. 또한 “참된 사람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A true man hates no one.)”라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인간에게 이토록 고결한 정신이 없다면 이는 만물에 영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사람다운 인간의 정신이 없다면 그것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 인류가 이룩한 찬란한 창조적 문명도 한낱 허상의 불과할 것이다.

신용산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