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들림시

[이운묵의 울림들림 시 리뷰] 돌 속의 별/류시화

오얏나무 위 잔잔한 구름 2018. 12. 21. 18:11

[이운묵의 울림들림 시 읽기 리뷰]
신용산신문 주간 제827호 2018년 12월 20일(목) ~ 12월 26(수)

돌 속의 별

시인/ 류시화


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 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무표정의 모순어법을


류시화 시인의 「돌 속의 별」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그 이유는 한 때 편협했던 사고의 기억으로부터의 반성이다. 돌 하나의 그렇게 많은 의미와 사유를 담아낸다는 것은 류시화 시인만의 깊고 깊은 사유와 상상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류시화 시인의 시 세계는 다소 신비주의적 시 세계관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류시화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상상력의 움직임은 ‘외부로 확산하려는 힘과 내부로 수렴하려는 두 힘의 갈등구조’이다.

이문재 시인은 이례적으로 문단이 바라보는 류시화 시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의 시들은 거의 변하지 않고 초기의 시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세상과 격절된 상태로 20대 중후반을 지내왔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댈 수도 있지만, 저 들끓던 80년대에서 자기를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변화 못지않은 견딤으로 본다. 일상 언어들의 직조를 통해, 어렵지 않은 보통의 구문으로 신비한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바로 이점이 그의 시의 주요한 미덕이다. 낯익음 속에 감춰져 있는 낯섦의 세계를 발견해내는 것. 이것이 시의 가장 큰 역할이 아닐까. 그의 시를 비롯한 시운동 초기의 시편들은 당시 '양쪽에서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참담했는데, 돌을 던지는 그들의 관점은 그의 시가 '발명품'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발명이 아닌 발견이다."라고 평가했다.

위의 시 「돌 속의 별」도 그런 시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낯익음 속에 감춰져 있는 낯섦의 세계를 발견’한 사유의 증표이다. 흔히 돌은 바위의 조각으로 모래보다 큰 것, 또는 천연의 무기질 고체로서 모래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광물질의 단단한 덩어리를 돌이라 한다. 돌은 전혀 생명성이 없는 광물체의 하나이다. 이런 광물체에 시인은 무한한 생명성과 긍정의 가능성에 대한 혼(魂)을 불어넣는 창조적 신의 대리인이다.

투명한 의식의 시선으로 돌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속에 별과 교감하며 돌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단단한 돌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서는 자각하기 어려운 지성이다. 그러나 시인은 물이 되어 돌의 뜨거운 심장을 돌고 돌아 나와 돌의 애달픈 울음소리에 자신의 울음소리를 보태어 긍정의 하모니를 조율하고 있다. 돌은 무표정의 대명사이다. 하지만 시인은 낮은 자세로 귀기우려 돌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무언의 돌 소리를 알아차리기 위해 아포리즘적 뮤즈의 의식으로 몰입해 가는 시적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에는 시인의 생명 중시의 사상이 내재된 형이상학적 센티멘털리즘의 착목과 천착이란 생각이다.

하찮은 돌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에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편견과 편협을 뚫어내고 나와 세상의 저편과 이편을 균형감 있게 소통하려는 시인의 직관과 통찰은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불완전성을 완전성으로 승화시키는 작품이기에 큰 울림을 준다.